'기독교'에 해당되는 글 4건

“이것이 성령님이다” ---1부 :: 2008. 6. 3. 22:47

교회가 타락해가는 시대를 하나님나라의 애통하는 심정으로 바라보며 선지자의 음성을 발한 토저는 우리를 영적으로 크게 놀라게 한다. 우리의 게으르고 나른한 심령을 예리하게 할퀴고 지나간다. 토저의 메시지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좌우에 날선 ()으로 우리의 무딘 마음을 일도양단(一刀兩斷)한다.

성령 충만은 우리의 도덕 수준을 높이며, 우리의 지성을 날카롭게 하며, 성화(聖化) 감정을 고양시킨다고 토저는 강조한다.

1부에서는 성령님의 강림을 열망하라고 하신다. 많은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현재 기독교는 세상과 너무나 뒤엉켜버려 져있다. 이렇게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성경의 교훈을 모른다는 것이 아니고 성경의 분명한 교훈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일에 실패한 것이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화되어 그리스도를 진정한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제일 필요한 것으로 된다. 우리의 문제는 이해 문제가 아니고 믿음과 순종 문제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과 구별되라고 하신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세상이란 무엇인가?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들, 그것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것들,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들, 이것들은 외형이 도덕적으로 저질이든 고상하든 간에 모두 세상이다. 때문에 우리들은 이런 세상의 영과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에녹이 그의 시대에 하나님과 동행했듯이 우리가 우리의 시대에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세상을 거부해야 한다. 세상을 단호히 거부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우리는 한쪽 다리는 세상에, 그리고 다른 다리는 세상에 걸쳐두고 소위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령님과 동행하는 법을 훈련하여야 하고 세상과 동행하지 말아야 한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첫째로 성령님은 사랑 게신 인격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둘째는 예수님께 점점 몰두해야 하며 셋째는 가운데 행하고 넷째는 생각을 깨끗한 성소 만들어야 한다. 다섯째는 성경이 성령님을 무엇이라고 가르치는지 연구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성령님과 가까워질 있다.

진정한 하늘 복을 받고 싶으면 성령을 받아야 한다. 우선 성령 강림의 의미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데 여기에는 4가지 증거가 있다. 그것들로는 성경과 세례 요한의 증거 그리고 성부 하나님의 증거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들이다. 이러한 증거는 외적 증거이고 중요한 내적 생명의 직접적인 증거가 있다. 뜻인즉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직접 활동하시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우리들에게 감동을 주셨고 또한 영적 권세를 주셨다.

기독교는 인간의 전적 무능력을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잠재력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믿어야 한다. 성령님은 그분 자신이 인간의 영에 직접 작용하셔서 그분의 거룩한 목적을 이루신다. 때문에 우리들은 생명을 주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구해야 한다. 위로부터 능력이 인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문제가 결코 해결될 없다. 성령님이 없는 기독교의 멍하고 실재하지 않는 같은 상대를 고칠 있는 분은 오직 성령님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룩한 위엄과 가슴 떨리는 신비를 우리에게 드러낼 있는 것도 오직 성령님의 능력의 내적 작용뿐이다.

'신앙서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자도 감상문.  (0) 2008.10.17
제자도  (0) 2008.10.06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0) 2008.05.09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0) 2008.05.09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0) 2008.05.09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 2008. 5. 9. 22:13

제2장 성령의 충만

성령의 충만에 관해 말할 때 우리는 이 선물이 계속적으로, 그리고 점차적으로 전유되어야 하는 것임을 인정한다.

1. ‘세례’와 ‘충만’의 차이

성령의 충만은 성령 세례의 결과인 것이다. 세례는 예수계서 행하신 것이고, 충만은 그들이 받은 것이다. 세례는 단 하나밖에 없는 최초적인 체험이고, 충만은 계속적이며 영속적인 결과, 규범을 뜻하였다. 최초적인 사건인 세례는 반복될 수도 없고 상실될 수도 없다. 그러나 충만은 반복될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서든지 유지되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그것이 유지되지 않으면 상실되고 만다. 만일 상실되어도 또다시 회복될 수 있다.

성령으로 ‘충만케 되어진’ 혹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에게 새 개의 범주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첫째로, 모든 헌신한 기독교인들의 기준임을 의미한다. 둘째로, 이 표현은 특정한 사역이나 직무를 수여한 것을 의미한다. 셋째로, 성령 충만은 평생 동안의 직무보다는 오히려 당면한 의무, 특히 일을 시작할 때 사람들을 준비시키려고 주어지는 경우가 있다.

성령 충만의 증거는 성령의 은사를 행하는 데 있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데 있다. 그린도 성도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고, 성령에 의하여 풍성하게 은사를 받았지만 성령으로 충만해 있지 않았다. 성경에 의하면 성령은 받은 후 반드시 ‘방언’을 한다는 말은 가당치 않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방언의 은사는 여러 가지 은사 중에 하나이므로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 성령의 충만의 증거는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성령 충만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을까?

2. 계속적인 충당

성령으로 충만한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주 예수께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의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예수께로 오는 것과 그를 믿는 것에는 차이점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와 믿음으로 단 한번 예수께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도 계속해서 그에게 나가서 마신다. 왜냐하면 우리는 계속해서 목마르기 때문이다. 육체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 우리는 목마를 때마다 물을 마신다. 영적으로도 또한 이것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마시는 물은 흐르는 물이 된다. “어떤 사람도 성령을 소유하고는 그 성령이 자신에게만 있도록 억제할 수가 없다. 성령은 어디에 계시든지 흐른다. 우리는 복음 전파에 대해 관심도 없고, 또 복음 전파를 하지도 않으면서 성령 만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지 경계를 해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한 기독교인들에게서 다음 사람들의 축복으로 잇는 자동적인 흐름이다. 성령 충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해서 충당하기 때문이다.

3. 성령 충만의 표시

엡5:18-21은 성령 충만에 대한 명령을 그 내용으로 하면서도 성령 충만에 대한 증거를 강조한다. 성령 충만의 주요한 증거는 도덕적인 것이지 기적적인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성령의 열매에 있지 성령의 은사에 있지 않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와 은사를 묶는 강한 결합소이다.

술취함은 ‘부절제(AV)’ 또는 ‘방탕(RSV)’을 뜻한다. 술 취함을 피해야 할 이유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자기 통제를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그와 반대 현상인 성령 충만은 자기 통제를 상실하지 않는다. 오히려 갈 5:23에서 명시하고 있는 대로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는 절제이다. 성령 충만의 결과들은 사도들이 묘사하고 있는 대로 하나님과의, 그리고 성도들 상호간의 지성적이고, 절제적이며, 건전한 관계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성령 충만은 절제된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행위로 이끌어 기독교인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킨다. 성령 충만은 은밀하고 신비스런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그리고 우리들 상호 간의 도덕적인 관계이다.

그 첫 번째는 ‘말하는 것’이다. ‘혼잣말하다’로 되어 있다. ‘서로 화답하며(19절)’로 표현한 것은 확실히 잘한 일이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다는 첫 번째 증거가 서로 화답하는 데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인상적인 일이다. 성령 충만의 첫 번째 표시는 교체이다. 더욱이 그것은 영적인 교제이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기 때문이다. ‘노래하며 찬송하라’(19절)는 성령 충만의 두 번째 결과로 이끈다. 그를 그의 백성들에게 증거함으로써 즐거이 그를 찬송케 한다. 셋째로, 우리는 ‘범사에 항상 감사’(20절)해야 한다. 성령 충만한 성도는 모든 일에 대해 언제나 감사한다. 감사하지 않는 시간과 감사하지 않는 환경이 있을 수 없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성부 및 성자와 바른 관계, 그리고 찬양하는 관계를 맺게 한다. 성령 충만한 성도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실제로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첫 번째의 표시인 ‘서로 화답함’과 네 번째의 표시인 피차 복종하는(21절) 우리의 상호 관계를 중시한다. 성령 충만한 성도의 표시는 스스로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복종하는 것이다. 우리의 첫 번째 의무는 주 그리스도를 경외하고 그에게 겸손히 복종하는 것이다. 성령 충만이 나타나는 두 가지 중요한 영역은 예배와 교제이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 찬용하고 우리 아버지께 감사할 것이며, 서로 화합하고 복종할 것이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리고 사람과 바른 관계를 맺게 해 준다.

4. 성령 충만의 명령

첫째로, 그 동사는 명령법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선택하신 사도들 가운데 한 사람이 전적인 권위를 가지고 우리에게 주는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둘째로, 그 동사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 성령의 충만은 어떤 사람에게만 예약된 특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된 의무이다. 셋째로, 그 동사는 수동태이다. 그것은 ‘성령으로 하여금 너에게 충만케 하라’ 넷째로, 그 동사는 현재 시제이다. 현재 명령법은 그 문제를 영원히 결말지을 어떤 극적이고 결정적인 경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충당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밝힘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며, 아는 즐거움에 참여함으로써 믿음을 가진다.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불신앙을 회개하고 믿음을 더해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지식이 자랄 때, 우리의 믿음도 그와 함께 자라고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목적과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더욱 많이 알게 될 것이다.

5. 보통 기독교인

중생의 의식적인 과정이라는, 다시 말해서 거듭난 사람이 자기의 내면 속에서 무슨 일이 발생하는지를 의식할 수 있다는 견해를 뒷받침할 만한 성경적 근거는 하나도 없다. 우리가 중생 혹은 영적인 태어남이라고 부르는 이 영적인 생명의 주입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은 마치 육적인 태어남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 두 경우 다 자기의식 곧 살아 있다는 의식은 후에 생겨난다. 회심한 후의 저자원적인 기독교 생활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진실로 성령 세례를 받았지만 여전히 성령 세례가 가능케 하는 생활 이하의 삶을 살고 있다. 그 이유는 성령으로 충만해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하나의 경험을 두 단계 혹은 그 이상으로 가진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기독교인들의 죄로 말미암아 기인한 것이다.

6. 특별한 경험들

첫째는, 이러한 경험들 중에 몇 가지는 사탄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둘째는, 아주 많은 경험들이 심리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 인간의 정신에서 기원하기 때문이다. ‘방언’은 곧 의식 있는 마음의 통제를 받지 않고 나오는 비자발적인 언어는 힌두교, 이슬람교, 몰몬교 등에서도 널리 알려진 것이며 어떤 의학적인 조건하에서도 행해질 수 있다. 인간의 정신에서 나오는 것은 사탄에게서 나오는 것과 같지 않다. ‘심리적인’ 것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는 중립적일 수도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의를 장려하느냐 하는 데 있다. 셋째는 현대의 어떤 체험들은 실제로 회심으로 인한 체험처럼 보인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인의 삶은 새로 태어남, 곧 다양한 방법으로 일어날 수 있지만 반드시 성령의 ‘선물’ 혹은 ‘세례’를 포함하는 새로운 태어남으로 시작하여 성숙함에 이르는 성장으로, 다시 말해서 아주 다양하고 보다 깊은 체험들을 가질 수 있는 과정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체험들은 실로 감동적이고 심지어 흥분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중에 어느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와 화목하셨을 때 나타나는 그의 첫 번째 은혜 사역의 중요성과 족히 비교할 수가 없다. 결과로서 일어나는 경험들에 대한 나의 논점은 그것들이 모두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7. 권면

첫째로, 우리 모두는 성령께서 활발하게 일하시는 이 시대에 그가 말씀하시는 바와 우리 사이에서 행하시는 것에 민감해야 한다. 우리는 성령을 교사로 혹은 증거자로 아는 가운데 기뻐해야 하며 그가 우리에게 주신 사랑, 희락, 화평, 그리고 능력 가운데서 기뻐해야 한다. 둘째로, 성령은 자주적인 영이심을 기억하라. 그는 ‘그 뜻대로’ 여러 가지 영적인 은사들을 부여하실 뿐 아니라 또한 그 뜻대로 특별한 사역을 행하시기도 한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공유하는 것은 영적인 은혜이지 영적인 은사, 곧 영적인 체험이 아니다. 당신은 체험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양하도록 하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권고할 때는 체험에 근거하지 말고 성령에 기준하여 하라. 셋째로, 계속해서 성령으로 충만해지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령을 좇아 행하기를 추구하라. 이 공통된 근거를 기쁨으로 함께 가질 때 우리들 사이에 어떤 분열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신앙서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것이 성령님이다” ---1부  (0) 2008.06.03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0) 2008.05.09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0) 2008.05.09
오직 한 길  (0) 2008.04.26
성경의 권위  (0) 2008.04.05

오정현 목사님 3월30일 주일설교 노트. :: 2008. 4. 8. 15:05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할레루야! ㅋㅋ



주후 2008년 3월 30일 주일설교 참고_교리(8)


은혜로 주신 통로 (세례)

(로마서 6:3~4)


1.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치지 않고 신앙생활 잘할 수 있도록 ‘은혜의 방편’, ‘은총의 통로’를 허락하셨다.

2. 통상적인 은총의 통로

1) 하나님의 말씀(시 19:7~12)

2) 기도(마 7:7,8)는 ; 신앙의 마스터 키, 영적인 호흡, 신앙의 생명줄, 영적인 무기, 믿음의 손길이다.

3) 실제적인 은혜의 외적방편(어거스틴 ‘세례는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찬과 세례

3. 은혜의 방편이 그리스도인에 의해서 영구히 준수되는 세 가지 기준

1)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명령하셨는가?

2) 신약 교회가 그것을 실천하였는가?

3) 그것이 오늘날 현대 교회에서 의미가 있는가?

4. 이것은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 ) 이다.

1) 성도는 반드시 세례 받는다(사도행전에 나타난 10번의 세례 사건).

행 2·8·9·10·16·18·19장

시 119:60 “주의 계명들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하지 아니하였나이다”

I. 세례의 의미

1) 3절 “합하여” ; 세례(baptism)의 뜻 - “~와 같이 되다”, “정체성이 변화되다(baptize)”

2) 4절 “죽으심”과 합하여 ; 물은 죽음을 뜻함

죄에 대해서는 ( 민감 ) 해진다. 갈 5:24

의에 대해서는 ( 용감 ) 해진다. 13·14절

II. 세례에 대한 예수님의 모범(마 3:13~17)

1)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심으로 죄인과 같이 되셨다.

2)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심으로 모범이 되셨다.

3) 예수님의 세례는 예수님의 공적인 사역이 시작되었다는 선포였다.

결론

1. 필립 헨리(Henry)의 고백

“나는 세례를 통하여 성부 하나님을 나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최고의 진리의 선포자로 받아들입니다. 나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왕 나의 구세주로 받아들입니다. 나는 성령 하나님을 나를 거룩케 하시는 분, 나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고, 위로하시는 분으로 받아들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내 모든 삶의 행동의 규칙으로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백성을 나의 백성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모든 것, 내가 가진 것,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주님께 헌신하고 드립니다. 나는 이 시간 의지적으로, 의식적으로, 또 자유함 가운데서 그리고 영원히 이 언약을 지키겠습니다.”

2. 우리의 고백

“나를 의의 병기로 드려도 아깝지 않다.”


'선교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Who is Jesus?  (0) 2009.04.11
중국어로 사영리 성결 구절 외우기  (0) 2009.02.28
예수전 그림. (궁금하다)  (0) 2008.10.24
바울은 누구인가?  (0) 2008.04.05
중국교회의 이단.  (0) 2008.04.02

바울은 누구인가? :: 2008. 4. 5. 01:20

중국어 예배의 한승호 형제님한테서 받은 편지인데...
"바울은 누구인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우리 교회다니는 정선자 자매님이 발표를 했답니다.

바울/사울은 누구인가?


기독교 박해와 회심

기독교교회의 가장 초기의 문필가요, 신학자요, 이방인 선교사인 바울 그는 기독교역사에 있어서 처음으로 이방인 선교를 시작하여 교회를 설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기독교신학의 창설자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가 남긴 여러 서신들은 현존하는 가장 고대의 기독교 문서로서 기독교신학의 근간이 되고 있다.

우리가 왜 바울이 개종 전에 기독교 박해에 앞장을 섰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보유하고 있는 두 종류의 이름, 곧 전통적인 유대인으로서의 “사울”과 다소와 로마제국의 시민권자로서의 “바울”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그가 특별히 유대와 희랍 등 두 종류의 문화적 배경에서 성장해왔다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1. 다소와 로마 시민권자로서 바울

우리는 비록 바울 자신이 그의 서신에서 직접 말하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전해주고 있는 것처럼 로마제국 내의 길리기아 지역의 수도였던 희랍도시 다소에서 다소와 로마의 시민권자로 출생하였다라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다.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가서 동족 유대인들 때문에 당시 예루살렘에 있었던 로마 군대 천부장에게 체포되었을 때에 그는 천부장을 향해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성의 시민이다”(행 21:39)라고 말하였으며, 또 천부장의 병사들이 그를 채찍질하였을 때 곁에 섰던 백부장을 향해 “너희가 로마 사람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행22:25)항의하며, 또 천부장에게 이르되“나는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자이다”(행 22:28)라고 대답하였다.

사도행전에 나타나있는 이와 같은 누가의 증언으로부터 우리가 바울 자신의 가정환경과 가문의 상황을 어느 정도 추측하는 것이 가능하다. 당시 시민권만을 획득하는데 있어서도 최소한 500 드라크마(당시 5백 드라크마는 성인 노동자의 2년 수입에 해당하는 상당한 금액이었다). 이상의 돈이 있어야 했고, 그리고 당시 로마의 시민권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사회적 신분을 갖춘 사람들에게 주어졌다라는 점을 상기할 때 당시 바울의 가정은 다소에서 상당한 재력과 명성을 가진 유대인 가문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바울이 어릴 때 그 부모들이 상당한 재정적 부담을 감수하면서 그를 유대인들의 성지인 예루살렘으로 유학시켜 거기서 엄한 바리새파 랍비교육을 받도록 했다(행 22:3)라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해준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2. 히브리인과 바리새인으로서의 사울

바울은 빌립보서 3장 5절에 있는 그의 자서전적 고백에서 “내가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11장 22절에서도 유대 적 배경을 자랑하는 자신의 반대자들을 염두에 두면서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라고 말하고 있으며, 로마서 11장 1절에서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점에서 사도행전 22장 3절의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화에서 엄한 교육을 받았다”라는 누가의 보도와 바울 자신의 증언 사이에는 분명한 일치가 있다.

바울이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라는 사실은 비록 부모들이 희랍의 도시 다소에 살았지만 그 부모는 희랍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유대교와 전통을 철저히 고수하는 전통적이며 대단히 보수적인 유대인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그가 베냐민 지파의 출신이라고 하는 것은 바울의 가정이 개종자의 후예가 아니라 유대의 초대 임금 사울의 가문이며, 유다지파를 끝까지 지원한 명문가문인 것을 강조해주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자서전적인 증언에서 “바리새인”으로 말하고 있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대로 “바리새파”는 1세기 유대 사회에서 “사두개파”, “에센파”와 함께 가장 영향력을 가진 종교 집단이었다. 사두개파가 주로 당시 소수의 정치 및 종교 지배층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바리새파는 유대 종교와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일종의 대중적인 종교-사회적 운동을 띠고 있어 일반 백성들로부터 가장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바리새인이 되는데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길은 율법에 정통한 랍비의 문하생이되어 철저히 율법을 공부하는 것, 그것도 지상에서 가장 거룩하며 율법 공부에 가장 적합한 장소로 불리워지고 있던 예루살렘에서 공부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가 전하고 있는 것처럼 바울은 청소년시절에 예루살렘에 와서 당대의 가장 유명한 바리새파 랍비로 알려져 있던 랍비 가말리엘 1세 문하생이 되어 정규적인 율법 공부를 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갈라디아서 1:14절에서 바울 자신이 친히 “내가 내 백성동년배 중에서 누구보다도 유대교에 앞선 진보를 보여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3. 크리스천 박해자로서의 사울과 회심

사도행전에 18:12절에 언급되고 있는 바울을 재판한 아가야 총독 갈리오가 델피 신전에 의존하여 그의 재임기간이 주후 51년에서 53년으로 볼 때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지역에 대략 주후 50/51년에 도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예루살렘 첫 번째 회의는 48/49년에 열렸을 것으로 추산된다. 우리가 다시 갈라디아서에 근거하여 예루살렘회의를 기점으로 하여 15년이나 혹은 17년을 더 뒤로 돌아가면 우리는 바울의 개종 연대를 32/34년 사이로 잡을 수 있다. 예수의 십자 처형이 주후 30년4월에 있었다고 볼 때 우리는 다메섹도상에서의 바울의 개종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시기로부터 별로 떨어지지 않는 아주 이른 기독교 초기에 이루어졌다라고 볼 수 있다.

사울은 무슨 이유 때문에, 무슨 동기에서 스데반을 중심한 헬라계 유태인 크리스천들을 박해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는가?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이 문제에 관련하여 그 자신의 동년배중 누구보다도 조상들의 유전, 말하자면 유대종교의 핵심인 율법에 대한 지나친 “열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다(갈 1:14). 조상들의 유전에 대한 열심과 크리스천들의 핍박 사이에는 서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사울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 때문에 유대종교의 근간인 성전을 모독하고 율법을 깨뜨리는 크리스천들을 필요하다면 죽여서라도 제거하여 자신의 종교를 고수하려고 했던 것이다.

바울은 이와 같은 종교적 열심 때문에 유대종교 안에서 일어난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를 박멸시키려 했다. 갈라디아서 1:13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고 잔해하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사울이 이토록 크리스천들을 박해한 이유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크리스천들을 핍박하는데 앞장을 섰는가? 왜 그는 크리스천들 때문에 조상들의 전승에 대한 강한 열심을 가지게 되었는가?

사울이 크리스천들 핍박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라는 사실은 그가 누구 못지않게 초대 크리스천들과 그들의 신앙에 관하여 상당한 이해가 있었다라는 것을 전제한다. 왜냐하면 알지 않고 행동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울 자신의 입장에서 볼 때 초대 크리스천들의 신앙은 그 자신이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유대교 종교에 심히 위협적인 것으로 여겨졌음이 분명하다. 특별히 그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스데반을 중심한 헬라계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유대민족의 신앙과 생활의 중심점이요 보루였던 예루살렘 성전과 율법에 도전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누구보다도 강한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일찍이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 파멸을 예고하였을 때 당시 유대 정치 지도자들이 분노하여 이를 예수 처형의 결정적인 근거로 삼았던 것처럼(막14:58; 마26:61; 요2:19),주로 신유대 종교 보존에 힘쓰는 바리새파 출신인 사울은 예수의 전철을 따라 이제 할라계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성전과 율법을 비판하는 것을 보고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미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백성들을 미혹하고 유대종교를 위협하였기 때문에 십자가에 처형시킨 나사렛 예수를 유대인들이 민족적으로 기다리는 메시아로, 하나님의 아들로, 주님으로 고백하고 전파하는 것을 알았을 때 더 더욱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알고 있는 신명기 21:22절은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고, 이미 자기 당대에 십자가처형을 받은 자가 이에 해당하는 자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당시 사울은 기독교 신자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십자가처형을 당한 예수를 오히려 메시아로, 하나님의 아들로 전파하였을 때 이를 하나님께 대한 신성 모독으로 간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후에 그가 다메섹 사건을 통하여 회심하였을 때 그 자신이 갈라디아서 3:13절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기 위해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았다”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러나 당시에는 십자가에 처형당한 나사렛 예수를 백성들을 거짓된 길로 인도하는 불경된 자로, 그래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울은 나사렛 예수를 추종하는 초대 크리스천 역시 나사렛 예수처럼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알고는 초대 크리스천 역시 나사렛 예수처럼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자로 알고 그들을 핍박하는데 앞장을 설 수 있었던 것이다.

갈라디아서 1:16절에서 스스로 메시아와 하나님의 아들로 자처하다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처형당했다고 생각했던 그 예수를 오히려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에게 그의 아들로 계시하셨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자신이 핍박했던 그 나사렛 예수가 오히려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믿는 모든 사람들의 구주와 주님으로 그에게 계시되었던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거짓되었다고 생각하여 핍박했던 크리스천들과 그들의 메시지가 옳았으며 반면에 그 자신이 신뢰해 왔던 모든 신앙들이 근본적으로 잘 못 되었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바울 자신이 갈라디아서 1:16절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자신에게 계시하신 것은 나로 하여금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파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하고, 롬 1:1,5절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구별되고, 은혜와 사도직을 받았다.(살전2:4; 고전1:17)라고 한 점을 볼 때 부정할 수 없다.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남과 동시에 새로운 사명이 주어졌을 때 지난날의 율법에 대한 그의 열심이 이제는 복음에 대한 열심으로 바뀌어졌던 것이다. 율법의 행위에 의해 의를 추구했던 바리새파 신학의 자리가 다메섹사건을 통하여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의로워지는 복음으로 대신 메워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지난날 자신이 그렇게 추구해 왔던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다 배설물처럼 취급하였던 것이다. 가치 판단에 대한 근본적인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빌 3:8). 그 자신의 지난날 크리스천에 대한 핍박이 크면 클수록 그 자신의 변화 또한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났던 것이다.


'선교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Who is Jesus?  (0) 2009.04.11
중국어로 사영리 성결 구절 외우기  (0) 2009.02.28
예수전 그림. (궁금하다)  (0) 2008.10.24
오정현 목사님 3월30일 주일설교 노트.  (0) 2008.04.08
중국교회의 이단.  (0) 2008.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