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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성령님이다” ---1부 :: 2008. 6. 3. 22:47

교회가 타락해가는 시대를 하나님나라의 애통하는 심정으로 바라보며 선지자의 음성을 발한 토저는 우리를 영적으로 크게 놀라게 한다. 우리의 게으르고 나른한 심령을 예리하게 할퀴고 지나간다. 토저의 메시지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좌우에 날선 ()으로 우리의 무딘 마음을 일도양단(一刀兩斷)한다.

성령 충만은 우리의 도덕 수준을 높이며, 우리의 지성을 날카롭게 하며, 성화(聖化) 감정을 고양시킨다고 토저는 강조한다.

1부에서는 성령님의 강림을 열망하라고 하신다. 많은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현재 기독교는 세상과 너무나 뒤엉켜버려 져있다. 이렇게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성경의 교훈을 모른다는 것이 아니고 성경의 분명한 교훈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일에 실패한 것이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화되어 그리스도를 진정한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제일 필요한 것으로 된다. 우리의 문제는 이해 문제가 아니고 믿음과 순종 문제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과 구별되라고 하신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세상이란 무엇인가?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들, 그것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것들,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들, 이것들은 외형이 도덕적으로 저질이든 고상하든 간에 모두 세상이다. 때문에 우리들은 이런 세상의 영과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에녹이 그의 시대에 하나님과 동행했듯이 우리가 우리의 시대에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세상을 거부해야 한다. 세상을 단호히 거부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우리는 한쪽 다리는 세상에, 그리고 다른 다리는 세상에 걸쳐두고 소위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령님과 동행하는 법을 훈련하여야 하고 세상과 동행하지 말아야 한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첫째로 성령님은 사랑 게신 인격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둘째는 예수님께 점점 몰두해야 하며 셋째는 가운데 행하고 넷째는 생각을 깨끗한 성소 만들어야 한다. 다섯째는 성경이 성령님을 무엇이라고 가르치는지 연구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성령님과 가까워질 있다.

진정한 하늘 복을 받고 싶으면 성령을 받아야 한다. 우선 성령 강림의 의미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데 여기에는 4가지 증거가 있다. 그것들로는 성경과 세례 요한의 증거 그리고 성부 하나님의 증거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들이다. 이러한 증거는 외적 증거이고 중요한 내적 생명의 직접적인 증거가 있다. 뜻인즉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직접 활동하시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우리들에게 감동을 주셨고 또한 영적 권세를 주셨다.

기독교는 인간의 전적 무능력을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잠재력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믿어야 한다. 성령님은 그분 자신이 인간의 영에 직접 작용하셔서 그분의 거룩한 목적을 이루신다. 때문에 우리들은 생명을 주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구해야 한다. 위로부터 능력이 인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문제가 결코 해결될 없다. 성령님이 없는 기독교의 멍하고 실재하지 않는 같은 상대를 고칠 있는 분은 오직 성령님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룩한 위엄과 가슴 떨리는 신비를 우리에게 드러낼 있는 것도 오직 성령님의 능력의 내적 작용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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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 2008. 5. 9. 22:18

제3장 성령의 열매

그 첫 번째는 하나님과 기독교인의 관계를, 두 번째는 타인과의 관계를, 마지막은 자신과의 관계를 묘사한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인 ‘사랑, 희락, 화평’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가슴에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의 희락을,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화평을 놓으신다. 둘째는, 타인들과의 관계인 ‘오래 참음, 자비, 양선’이다. 타인들의 무례함과 불친절을 참고 보복을 거부하는 것이 인내이다. 자비는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부정적인 관대함을 넘어서 모든 사람이 잘 되기를 긍정적인 인자함이다. 양선은 호의를 행동으로 옮겨 구체적이고 건설적인 방법으로 솔선하여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셋째는, 우리 자신에 대한 ‘충성, 온유, 절제’이다. ‘충성’이란 것은 믿음이라기보다 신뢰이다. 절제는 우리의 말과 생각과 욕망과 감정을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1. 초자연적인 기원

첫 번째 진리는 성령의 열매는 그 기원이 초자연적이라는 것이다. ‘성령’은 인간의 구조 중의 한 부분, 곧 우리의 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 거하여 그들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형시키는 일을 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다. ‘육체’와 ‘성령’의 이러한 구별로 보아 ‘육체의 일’이란 우리가 자기 멋대로 자연적으로 행하는 행위이고, ‘성령의 열매’란 우리가 성령께 의존할 때 그가 우리 안에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시는 성질들로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2. 자연적인 성장

이러한 성품들이 성령의 열매로 묘사되고 있는 점이다. 우리는 언제나 변함없이 심은 것을 거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심을지를 결정함으로써 무엇을 거두게 될지 미리 측정할 수 있다.

반대로 성령을 위하여 심으면 ‘영생’ 곧 현재에서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우리를 위하여 준비된 실제적으로 충만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거둔다.

3. 점진적인 성숙

성령은 한 영혼을 새로 태어나게 하는 동시에 그 영혼에 생명을 심지만 성숙한 기독교인의 성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시간을 그것도 오랜 시간을 들인다. 하나님의 사역의 점진성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열매 맺는 일에 성령과 협력하여 더욱 활동적이 될 것이고, 좋은 곡식을 거두기 위해서 심는 데 더욱 주의할 것이며,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헌신하는 습관에 더욱 연단을 받아 이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으로 은혜 안에서 성장하게 될 것이고 성령의 열매가 달콤하게 익게 될 것이다.

제4장 성령의 은사

성령의 선물은 교회의 단일성을 조성하고, 성령의 은사들은 교회의 목회를 다양하게 한다.

1. 영적 은사들의 본질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 12:4-6)

4절 카리스마타 - 하나님의 은혜의 은사들

5절 디아코니아이 - 직임

6절 에네르게마타 - 같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 가운데서 활기를 돋우시고 역사하시는 역사, 행위 능력

이 세 단어들을 조합시키면 영적인 은사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의하여 부여되어, 그에 합당한 봉사를 할 자격을 주는 어떤 능력’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2. 은사는 얼마나 많은 종류가 있는가?

신약 성경에는 전부 20개 혹은 그 이상의 뚜렷한 은사들이 언급되어 있다. 나는 하나님께서 더 깊은 체험을 주시듯이 더 깊은 여러 가지 영적인 은사도 주신다고 과감히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은 풍요하시고 다채롭고 다양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3. 영적인 은사와 자연적인 재능의 관계

차이점: 창조와 섭리의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재능을 주시지만 새로운 창조 곧 교회의 하나님은 단지 그의 구속된 백성에게만 ‘영적인 은사’를 주신다. 그러므로 달라진 것은 곧 자연적인 재능을 영적인 은사로 바꾸어 놓은 것은 그들의 목적과 동기이다. 성경으로 증명해 볼 때 자연적인 재능과 영적인 은사 사이에 너무 엄격하게 분리선을 그어서는 안 된다.

4. 영적인 은사는 모두 다 기적적인가?

기적적인 은사들에는 무엇이 있는가? ‘병 고치는 사람들’도 ‘각종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과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들’. 이것들이 기적적은 은사라고 가정할 때, 오늘날도 그것들은 여전히 주어지는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자유, 자주하는 우주의 창조주이시다. 그는 자신의 능력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보존하시며, 모든 자연은 그에게 복종한다. 그는 기적을 행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기적을 행하셨다. 우리 모두 긴급히 요구하고 있는 바는 초자연 속에서가 아니라 자연 속에서, 기적 속에서가 아니라 역사 안에서 우선적으로 일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경적인 계시를 파악하는 일이다.

일단 역사와 자연의 과정을 통하여 끊임없이 일하시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보기 시작하면, 모든 치료는 그것이 물리적인 방법, 심리적인 방법, 수술의 방법에 의한 것이든 그러한 방법이 없이 된 것이든 하나님의 치료임을 알게 될 것이다. 물리, 심리, 수술에 의한 방법은 아마도 비기적적인 치료라고 한다. 기적들의 주된 목적은 새로운 계시가 나타난 것을 입증하는 데 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기적에 대한 주장에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완강하게 불신해서도 안 되고 무비판적으로 경신해도 안 되며, 오히려 ‘나는 오늘날 기적들을 일상적으로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적들을 주시므로 입증한 특별 계시가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론 하나님은 자유, 자주하신 분이므로 하나님께서 기꺼이 기적들을 행하시는 특별한 상황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솔직하게 연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5. 성경에 나오는 영적인 은사는 모두 오늘날도 주어지는가?

신약 성경에 언급된 카리스마타는 모두 다 이의 없이 유효하다는 전제로 시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사도들이나 선지자들이 계속 존재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사도’라는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첫째로, 예수께서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적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둘째로, 그 단어는 적어도 두 번 ‘교회의 사자들’, 곧 특별한 임무를 띠고 한 교회에서 다른 교회로 보내지는 메신저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볼 때 그 용어는 선교사들이나 특별한 사명을 띠고 파송되는 기독교인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목록들에 나타난 이러한 일차적인 의미에서 볼 때 비록 의심할 바 없이 오늘날 ‘선교사’라는 이차적인 의미를 가진 ‘사도들’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 성격상 그들에게는 계승자가 없다. 셋째로, ‘선지자’는 어떤가? 구약 시대로 돌아가서 성경적으로 이해하자면 선지자란 신의 계시의 도구로 주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 용어의 의미, 즉 성경의 본질적인 의미로 보건대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들의 증거 속에서 완성되었다고, 성경은 오래 전에 닫아졌으므로 더 이상 선지자들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해야 한다. 직접적이고 새로운 계시의 도두인 ‘선지자들’의 일차적인 의미에서 볼 때 이 카리스마는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다른 좀 작은 의미에서도 사용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 기능이 계시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미래의 사건에 대해 예언하는 것이었던 선지자 아가보와 같은 사람들이 오늘날도 있을 있다고 생각한다. 가능한 일이다.

바울은 그러한 의미로 인해 모든 카리스마타 중에서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묶어 말했던 것 같다. 또 그런 의미로 볼 때 우리는 그것들이 더 이상 교회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오늘날의 교회에 있어서 하나님의 가르치는 방법은 새로운 계시에 의해서는 아니라 그리스도와 성경 안에서 완성된 그의 계시에 대한 해석에 의해서이다.

6. ‘은사적’이란 단어

‘사도들과 선지사들’은 교회가 주는 공식적인 권위와 관계없이 하나님에 의해 부름을 받은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목사와 교사도 선지자만큼이나 ‘은사적’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도 하나님에 의해 부름을 받고 은사를 얻지 않고는 교회에 의해 직책을 지명받아서는 안 된다. 모든 교회는 은사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 지체들은 은사들의 결과로서 기능한다.

7. 영적 은사의 범위: 은사는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은사의 종류가 대단히 다양하다면 그 주심의 범위 역시 대단히 넓을 것이라고 대답해야 한다. 신약 성경은 모든 기독교인이 적어도 하나 이상의 영적인 은사 또는 봉사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 준다.

첫째로, 영적인 은사의 목록을 가지고 있는 네 개의 성경이 모두 다 이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은사들의 범위가 넓을 정도가 아니라 보편적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정말로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둘째로, 몸 비유이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은사를 가지며 따라서 그에 대한 책임을 가진다는 사실과 어떤 기독교인도 은사를 받지 않고 지나치거나 은사를 받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은 신약 성경의 교회에 대한 근본적인 교리이다. 우리의 임무는 하나님이 은사를 받을 일꾼들을 세우시도록 기도하고, 의식적으로 매장되어 있거나 무의식적으로 무시되고 있는 은사들을 계속해서 보존하며, 사람들을 권면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들을 행사하게 하고, 그들에게 그 은사들을 행할 기회가 있는 것을 확신시켜 주는 것이다. 물론 봉사를 자원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건전하고 성경적인 것은 교회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준비시켜 부르심으로 봉사하게 하는 방법들에 대해 정신 차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교회는 ‘은사 공동체’이다. 그 공동체의 모든 지체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하나 이상의 은사를 가지고 있다.

8. 영적 은사의 근원: 은사는 어디에서 오는가?

하나님께서 나온다는 것을 강조한다. 영적 은사는 하나님의 은사이다. 신약 성경은 이것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현한다.

첫째로, 영적인 은사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은사이다. 헬라 그 자체가 이것을 간명하게 지적해 준다. 카리스마타는 카리스에 의하여 주어지는, 곧 하나님의 과분한 사랑에 의하여 주어지는 선물이다. 둘째로, 영적인 은사는 하나님의 영의 은사이다. 비록 성령이 신성의 집행자이며 하나님은 오늘날 그 일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더 깊은 체험들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은사들도 성령에게만 속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고 삼위가 다 관련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셋째로, 영적인 은사는 하나님의 주권의 은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은사들과 다른 사람에게 주신 은사들은 모두 다 중요하며 필요하다. 그들은 함께 그 지체가 모두 적당하게 기능하는 그리스도의 몸을 완전하고 건강하게 구성한다. 우리를 질투와 허식에서 건져낼 수 있는 큰 진리는 영적인 은사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주어진 하나님의 은사라는 사실이다.

9. 영적 은사의 목적: 은사는 무엇을 위해 주어지는가?

하나님의 은사는 사용하기 위하여 주어진다. ‘봉사 은사’의 주된 목적은 교회를 ‘온전케 하고’ 세우는 것이다. 따라서 영적인 은사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돕고, 위로하고, 강하게 하기 위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온전케 한다’는 뜻이다. 모든 카리스마타는 개기독교인들과 전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주어져 있으므로, 더 많이 세울수록 더 중요한 것이다. 가장 가치 있는 은사는 가르치는 은사이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진리만큼 기독교인을 세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방언 그 자체로는 덕을 세울 만한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바울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개인적으로 방언하는 것도 강하게 말리고 있다. 어떤 독자들은 의심할 바 없이 고린도전서 14장 초두에서 사도 바울이 예언과 방언을 대조시키면서 예언하는 사람은 ‘교회의 덕을 세우지만’, 방언하는 사람은 ‘자신의 덕을 세우므로’ 개인적인 방언을 행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이것이 추론인지 질문을 제기한다.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로, 신약에서 말하는 ‘덕을 세움’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세우는 일을 가리킨다. 둘째로, 이미 고찰한 대로 우리는 모든 신령한 은사들이 ‘공동의 선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역을 위하여 주어지는 ‘봉사 은사’라는 가르침에 비추어 이 표현을 읽어야 한다.

우리 기독교인의 삶이란 깰 수 없는 네 가지 면--사랑, 진리, 은사, 봉사 -- 을 가진 고리 또는 원이라고 결론을 얻는다. 사랑은 결국 봉사로 나타나고 봉사는 은사를 사용하며, 가장 큰 은사는 진리를 가르치는 것인데 진리는 사랑 안에서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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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 2008. 5. 9. 22:13

제2장 성령의 충만

성령의 충만에 관해 말할 때 우리는 이 선물이 계속적으로, 그리고 점차적으로 전유되어야 하는 것임을 인정한다.

1. ‘세례’와 ‘충만’의 차이

성령의 충만은 성령 세례의 결과인 것이다. 세례는 예수계서 행하신 것이고, 충만은 그들이 받은 것이다. 세례는 단 하나밖에 없는 최초적인 체험이고, 충만은 계속적이며 영속적인 결과, 규범을 뜻하였다. 최초적인 사건인 세례는 반복될 수도 없고 상실될 수도 없다. 그러나 충만은 반복될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서든지 유지되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그것이 유지되지 않으면 상실되고 만다. 만일 상실되어도 또다시 회복될 수 있다.

성령으로 ‘충만케 되어진’ 혹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에게 새 개의 범주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첫째로, 모든 헌신한 기독교인들의 기준임을 의미한다. 둘째로, 이 표현은 특정한 사역이나 직무를 수여한 것을 의미한다. 셋째로, 성령 충만은 평생 동안의 직무보다는 오히려 당면한 의무, 특히 일을 시작할 때 사람들을 준비시키려고 주어지는 경우가 있다.

성령 충만의 증거는 성령의 은사를 행하는 데 있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데 있다. 그린도 성도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고, 성령에 의하여 풍성하게 은사를 받았지만 성령으로 충만해 있지 않았다. 성경에 의하면 성령은 받은 후 반드시 ‘방언’을 한다는 말은 가당치 않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방언의 은사는 여러 가지 은사 중에 하나이므로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 성령의 충만의 증거는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성령 충만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을까?

2. 계속적인 충당

성령으로 충만한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주 예수께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의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예수께로 오는 것과 그를 믿는 것에는 차이점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와 믿음으로 단 한번 예수께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도 계속해서 그에게 나가서 마신다. 왜냐하면 우리는 계속해서 목마르기 때문이다. 육체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 우리는 목마를 때마다 물을 마신다. 영적으로도 또한 이것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마시는 물은 흐르는 물이 된다. “어떤 사람도 성령을 소유하고는 그 성령이 자신에게만 있도록 억제할 수가 없다. 성령은 어디에 계시든지 흐른다. 우리는 복음 전파에 대해 관심도 없고, 또 복음 전파를 하지도 않으면서 성령 만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지 경계를 해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한 기독교인들에게서 다음 사람들의 축복으로 잇는 자동적인 흐름이다. 성령 충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해서 충당하기 때문이다.

3. 성령 충만의 표시

엡5:18-21은 성령 충만에 대한 명령을 그 내용으로 하면서도 성령 충만에 대한 증거를 강조한다. 성령 충만의 주요한 증거는 도덕적인 것이지 기적적인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성령의 열매에 있지 성령의 은사에 있지 않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와 은사를 묶는 강한 결합소이다.

술취함은 ‘부절제(AV)’ 또는 ‘방탕(RSV)’을 뜻한다. 술 취함을 피해야 할 이유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자기 통제를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그와 반대 현상인 성령 충만은 자기 통제를 상실하지 않는다. 오히려 갈 5:23에서 명시하고 있는 대로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는 절제이다. 성령 충만의 결과들은 사도들이 묘사하고 있는 대로 하나님과의, 그리고 성도들 상호간의 지성적이고, 절제적이며, 건전한 관계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성령 충만은 절제된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행위로 이끌어 기독교인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킨다. 성령 충만은 은밀하고 신비스런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그리고 우리들 상호 간의 도덕적인 관계이다.

그 첫 번째는 ‘말하는 것’이다. ‘혼잣말하다’로 되어 있다. ‘서로 화답하며(19절)’로 표현한 것은 확실히 잘한 일이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다는 첫 번째 증거가 서로 화답하는 데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인상적인 일이다. 성령 충만의 첫 번째 표시는 교체이다. 더욱이 그것은 영적인 교제이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기 때문이다. ‘노래하며 찬송하라’(19절)는 성령 충만의 두 번째 결과로 이끈다. 그를 그의 백성들에게 증거함으로써 즐거이 그를 찬송케 한다. 셋째로, 우리는 ‘범사에 항상 감사’(20절)해야 한다. 성령 충만한 성도는 모든 일에 대해 언제나 감사한다. 감사하지 않는 시간과 감사하지 않는 환경이 있을 수 없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성부 및 성자와 바른 관계, 그리고 찬양하는 관계를 맺게 한다. 성령 충만한 성도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실제로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첫 번째의 표시인 ‘서로 화답함’과 네 번째의 표시인 피차 복종하는(21절) 우리의 상호 관계를 중시한다. 성령 충만한 성도의 표시는 스스로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복종하는 것이다. 우리의 첫 번째 의무는 주 그리스도를 경외하고 그에게 겸손히 복종하는 것이다. 성령 충만이 나타나는 두 가지 중요한 영역은 예배와 교제이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 찬용하고 우리 아버지께 감사할 것이며, 서로 화합하고 복종할 것이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리고 사람과 바른 관계를 맺게 해 준다.

4. 성령 충만의 명령

첫째로, 그 동사는 명령법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선택하신 사도들 가운데 한 사람이 전적인 권위를 가지고 우리에게 주는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둘째로, 그 동사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 성령의 충만은 어떤 사람에게만 예약된 특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된 의무이다. 셋째로, 그 동사는 수동태이다. 그것은 ‘성령으로 하여금 너에게 충만케 하라’ 넷째로, 그 동사는 현재 시제이다. 현재 명령법은 그 문제를 영원히 결말지을 어떤 극적이고 결정적인 경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충당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밝힘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며, 아는 즐거움에 참여함으로써 믿음을 가진다.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불신앙을 회개하고 믿음을 더해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지식이 자랄 때, 우리의 믿음도 그와 함께 자라고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목적과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더욱 많이 알게 될 것이다.

5. 보통 기독교인

중생의 의식적인 과정이라는, 다시 말해서 거듭난 사람이 자기의 내면 속에서 무슨 일이 발생하는지를 의식할 수 있다는 견해를 뒷받침할 만한 성경적 근거는 하나도 없다. 우리가 중생 혹은 영적인 태어남이라고 부르는 이 영적인 생명의 주입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은 마치 육적인 태어남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 두 경우 다 자기의식 곧 살아 있다는 의식은 후에 생겨난다. 회심한 후의 저자원적인 기독교 생활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진실로 성령 세례를 받았지만 여전히 성령 세례가 가능케 하는 생활 이하의 삶을 살고 있다. 그 이유는 성령으로 충만해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하나의 경험을 두 단계 혹은 그 이상으로 가진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기독교인들의 죄로 말미암아 기인한 것이다.

6. 특별한 경험들

첫째는, 이러한 경험들 중에 몇 가지는 사탄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둘째는, 아주 많은 경험들이 심리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 인간의 정신에서 기원하기 때문이다. ‘방언’은 곧 의식 있는 마음의 통제를 받지 않고 나오는 비자발적인 언어는 힌두교, 이슬람교, 몰몬교 등에서도 널리 알려진 것이며 어떤 의학적인 조건하에서도 행해질 수 있다. 인간의 정신에서 나오는 것은 사탄에게서 나오는 것과 같지 않다. ‘심리적인’ 것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는 중립적일 수도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의를 장려하느냐 하는 데 있다. 셋째는 현대의 어떤 체험들은 실제로 회심으로 인한 체험처럼 보인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인의 삶은 새로 태어남, 곧 다양한 방법으로 일어날 수 있지만 반드시 성령의 ‘선물’ 혹은 ‘세례’를 포함하는 새로운 태어남으로 시작하여 성숙함에 이르는 성장으로, 다시 말해서 아주 다양하고 보다 깊은 체험들을 가질 수 있는 과정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체험들은 실로 감동적이고 심지어 흥분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중에 어느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와 화목하셨을 때 나타나는 그의 첫 번째 은혜 사역의 중요성과 족히 비교할 수가 없다. 결과로서 일어나는 경험들에 대한 나의 논점은 그것들이 모두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7. 권면

첫째로, 우리 모두는 성령께서 활발하게 일하시는 이 시대에 그가 말씀하시는 바와 우리 사이에서 행하시는 것에 민감해야 한다. 우리는 성령을 교사로 혹은 증거자로 아는 가운데 기뻐해야 하며 그가 우리에게 주신 사랑, 희락, 화평, 그리고 능력 가운데서 기뻐해야 한다. 둘째로, 성령은 자주적인 영이심을 기억하라. 그는 ‘그 뜻대로’ 여러 가지 영적인 은사들을 부여하실 뿐 아니라 또한 그 뜻대로 특별한 사역을 행하시기도 한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공유하는 것은 영적인 은혜이지 영적인 은사, 곧 영적인 체험이 아니다. 당신은 체험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양하도록 하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권고할 때는 체험에 근거하지 말고 성령에 기준하여 하라. 셋째로, 계속해서 성령으로 충만해지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령을 좇아 행하기를 추구하라. 이 공통된 근거를 기쁨으로 함께 가질 때 우리들 사이에 어떤 분열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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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 2008. 5. 9. 22:09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사례ㆍ 충만 ㆍ 열매 ㆍ 은사

(존 스토트)

서론

서구 세계 기독교 신앙의 대부분을 상실함으로써 또한 기독교 윤리도 상실하였다. 사회는 이제 의심할 바 없이 다원론적이고 허용적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기독교의 영향은 점차 감소해 가고, 사회는 점차 세속화되고 있다. 우리는 성령의 더 깊은 사역을 필요로 하게 된다. 왜냐하면 성령은 통일과 진리와 완성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을 필요로 하는 것은 서구 세계의 노인 교회들을 볼 때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볼 때도 그러하다. 주 예수께 속해 있다고 말하는 우리들 모두는 어떤 특별한 신앙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때때로 기독교인으로서의 생활과 일에 실수를 저지름으로써 괴로움을 겪는다.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더 깊고, 풍요하고, 총족하게 체험하기를 열망하고 있다.

연구의 기본 원리

첫째로, 기독교인들인 우리가 공통적으로 가져야 할 소망과 의무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하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이 뜻을 발견해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하여 성경에 나타난 이 계시는 우선 교훈적인 면에서 추구되어야지 묘사적인 면에서 추구되어서는 안 된다.

넷째로, 성경의 교훈으로부터 하나님의 목적을 배우려는 동기는 실제적이며 개인적인 것이지, 학적이거나 논쟁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제1장 성령의 약속

기독인 삶은 성령 안에서의 삶이다.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이 없이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생활과 성장은 고사하고 기독교인이 되는 것조차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기독교 신자들은 기독교인이 되는 첫 순간부터 성령을 체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의 삶은 새로운 출생 곧 ‘성령으로 인한’ 출생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성령께서는 스스로 오셔서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 성령의 내주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든지 공유할 수 있다.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때 성령은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 그는 또한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다.

성령께서 일단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안에 거처를 삼으시고 우리의 몸을 자기의 성전으로 만드시면 그의 성화의 사역은 시작된 것이다. 우리의 타락된 악한 성품들이 억제를 당하고 기독교인으로서의 인격이라는 좋은 열매들이 맺어지는 것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힘 때문이다. 그는 또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우리를 연합시킨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교제는 ‘성령의 교제’이며, 기독교인의 봉사는 성령 안에서 혹은 성령으로 하는 봉사이다. 또한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가시기 위해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하고, 맡기신 일을 잘 하도록 여러 가지 은사를 우리에게 주시는 이도 바로 성령이시다. 그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것은 천국을 확약해 주는 것인 동시에 천국을 미리 맛보게 하는 것이다.

1. 특별한 축복에 대한 약속

성령의 ‘부어 주심’ 혹은 ‘세례’는 새 시대의 주요한 특별한 축복 중의 하나였다. 새 시대를 ‘성령의 직분’이라고 한다. 성령은 하나님이시므로 영원하시다.

예수의 특별한 사역이 이중적임은 제거와 시여, 죄를 없애는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 두 가지 약속은 사실 예레미야가 예언한 ‘새 언약’의 두 가지 주요한 축복이기도 하다. 새 언약이 이제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성취되고 실증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회개한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오순절 전에 약속하셨던 성령의 선물을 받았으므로 하나님께서 오순절 날 부어 주신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모든 성경의 증거로 비추어 볼 때 성령의 ‘세례’는 성령의 약속 또는 선물과 같은 것이며, 죄를 없애는 것이 구원의 복음에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인 것처럼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으로 보인다. 죄인들이 회개하고 믿을 때 예수는 그들의 죄를 사해 주실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

2. 보편적인 축복에 대한 약속

성령의 부어 주심 혹은 세례가 보편적인 축복이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성령께서 관계하고 계시다는 사실로 보아 분명하게 되었다. 첫 번째, 요엘의 예언과 그에 대한 베드로의 이해이다. 요엘을 통해 주어진 성령의 약속은 성령의 선물의 보편성을 강조하고 있다. 베드로가 인용했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라.” (행2:17) 이것은 선물을 얻기 위한 내적인 준비와 회개 그리고 믿음과 관계없는 ‘모든 육체’를 의미한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이것은 연령, 성별, 민족, 계급에 관계없이 회개하고 믿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구약 시대의 성령의 사역과 오늘날의 그의 사역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첫째는, 모든 종류의 성도들이 다 지금은 성령의 축복에 참여하고 있다. 둘째는, 구약 시대의 성도들은 비록 하나님을 알고 새로 태어남을 체험하는 했어도 지금은 그들이 알지 못했던 새 언약과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또 선지자들과 주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성령의 특별 사역이 지금은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성령께서 성화 사역을 통해 성도들에게 그리스도를 계시하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신다는 것을 보았다.

3. 오순절

시작 부분에 나오는 120명과 끝 부분에 나오는 3000명이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들이 회개하고 믿자마자 지체 없이 일어났다. 이 두 무리, 120명과 3000명 사이의 이러한 차이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기준은 분명히 두 번째 그룹인 3000명이다. 우리는 3000명과 같이 오순절 사건 후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과 같이 우리도 죄 사함과 성령의 ‘선물’ 곧 ‘세례’를 한꺼번에 받는다.

성령의 부어 주심 그 자체는 새 시대, 메시야의 시대, 성령 시대의 시작을 완성했다. 오순절 이후로 모든 기독교인은 예외 없이 이 새 시대에 참여자가 되었고,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성령의 부어 주심으로 유효하게 하신 죄 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얻게 되었다. 구약의 성령의 오심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를 성취한 것일 뿐 아니라 예수께서 다락방에서 사도들에게 처음으로 말씀하신 특별한 약속을 성취한 것이기도 하다. 그 약속의 성취로 사도들은 성령으로 감동된 권위 있는 교사로서 특별한 사도의 임무를 준비하게 되었다. 오순절을 최초의 ‘부흥’으로 간주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았다.’ (갈3:14). 구원을 주는 믿음,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붙잡는 믿음임을 알 수 있다.

4. 사마리아 신자들

유대와 사마리아 사이의 그 오래된 분열이 교회 안에서도 살아남아서 유대 기독교인들과 사마리아 기독교인 사이에 무서운 분쟁이나 생기지 않을까. 바로 이러한 상황이 발전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지도자 격인 두 명의 사도가 그들에게 내려가서 조사하고 안수함으로써 그들의 회심이 순순함을 인정하고 확증할 때까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사마리아 성도들에게 성령의 선물을 주는 것을 보류하셨다는 가정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5. 에베소의 제자들

성경은 언제나 고백에 따라 사람들에게 명칭을 준다. 곧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신자라고 부르고,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 바울은 그들에게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다. 이것은 적어도 그가 그들이 성도임을 고백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어떤 이유로 인해서 바울이 그들의 신앙의 실제를 의심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들이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다’라고 답했다. 그렇다면 성령에 대하여 듣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기독교적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단 말인가. 지금 어떤 교사들은 이 이야기를 들어 표준적인 기독교인의 경험 속에서 성령의 선물 곧 세례는 회심에 이어서 일어나는 부차적인 그리고 결과적인 경험이라는 의견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정말로 이 이야기를 이렇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

6. ‘세례’라는 용어

‘세례’에는 ‘연합’이라는 개념이 있다. 물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공개 예식이다. 그것은 죄를 씻어 버리고 성령을 받는다는 가시적인 의미를 가진다.

7. 고린도전서 12장 13절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으로 마시게 하셨느니라. 따라서 이 구절에 나오는 성령의 세례는 큰 결합 요소이지 결코 분리 요소가 아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세례는 몇몇 기독교인들이 누리는 부차적이고 결과적인 체험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누리는 최초적인 체험이라는 결론을 거부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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