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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 2008. 5. 9. 22:18

제3장 성령의 열매

그 첫 번째는 하나님과 기독교인의 관계를, 두 번째는 타인과의 관계를, 마지막은 자신과의 관계를 묘사한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인 ‘사랑, 희락, 화평’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가슴에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의 희락을,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화평을 놓으신다. 둘째는, 타인들과의 관계인 ‘오래 참음, 자비, 양선’이다. 타인들의 무례함과 불친절을 참고 보복을 거부하는 것이 인내이다. 자비는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부정적인 관대함을 넘어서 모든 사람이 잘 되기를 긍정적인 인자함이다. 양선은 호의를 행동으로 옮겨 구체적이고 건설적인 방법으로 솔선하여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셋째는, 우리 자신에 대한 ‘충성, 온유, 절제’이다. ‘충성’이란 것은 믿음이라기보다 신뢰이다. 절제는 우리의 말과 생각과 욕망과 감정을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1. 초자연적인 기원

첫 번째 진리는 성령의 열매는 그 기원이 초자연적이라는 것이다. ‘성령’은 인간의 구조 중의 한 부분, 곧 우리의 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 거하여 그들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형시키는 일을 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다. ‘육체’와 ‘성령’의 이러한 구별로 보아 ‘육체의 일’이란 우리가 자기 멋대로 자연적으로 행하는 행위이고, ‘성령의 열매’란 우리가 성령께 의존할 때 그가 우리 안에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시는 성질들로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2. 자연적인 성장

이러한 성품들이 성령의 열매로 묘사되고 있는 점이다. 우리는 언제나 변함없이 심은 것을 거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심을지를 결정함으로써 무엇을 거두게 될지 미리 측정할 수 있다.

반대로 성령을 위하여 심으면 ‘영생’ 곧 현재에서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우리를 위하여 준비된 실제적으로 충만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거둔다.

3. 점진적인 성숙

성령은 한 영혼을 새로 태어나게 하는 동시에 그 영혼에 생명을 심지만 성숙한 기독교인의 성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시간을 그것도 오랜 시간을 들인다. 하나님의 사역의 점진성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열매 맺는 일에 성령과 협력하여 더욱 활동적이 될 것이고, 좋은 곡식을 거두기 위해서 심는 데 더욱 주의할 것이며,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헌신하는 습관에 더욱 연단을 받아 이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으로 은혜 안에서 성장하게 될 것이고 성령의 열매가 달콤하게 익게 될 것이다.

제4장 성령의 은사

성령의 선물은 교회의 단일성을 조성하고, 성령의 은사들은 교회의 목회를 다양하게 한다.

1. 영적 은사들의 본질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 12:4-6)

4절 카리스마타 - 하나님의 은혜의 은사들

5절 디아코니아이 - 직임

6절 에네르게마타 - 같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 가운데서 활기를 돋우시고 역사하시는 역사, 행위 능력

이 세 단어들을 조합시키면 영적인 은사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의하여 부여되어, 그에 합당한 봉사를 할 자격을 주는 어떤 능력’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2. 은사는 얼마나 많은 종류가 있는가?

신약 성경에는 전부 20개 혹은 그 이상의 뚜렷한 은사들이 언급되어 있다. 나는 하나님께서 더 깊은 체험을 주시듯이 더 깊은 여러 가지 영적인 은사도 주신다고 과감히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은 풍요하시고 다채롭고 다양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3. 영적인 은사와 자연적인 재능의 관계

차이점: 창조와 섭리의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재능을 주시지만 새로운 창조 곧 교회의 하나님은 단지 그의 구속된 백성에게만 ‘영적인 은사’를 주신다. 그러므로 달라진 것은 곧 자연적인 재능을 영적인 은사로 바꾸어 놓은 것은 그들의 목적과 동기이다. 성경으로 증명해 볼 때 자연적인 재능과 영적인 은사 사이에 너무 엄격하게 분리선을 그어서는 안 된다.

4. 영적인 은사는 모두 다 기적적인가?

기적적인 은사들에는 무엇이 있는가? ‘병 고치는 사람들’도 ‘각종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과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들’. 이것들이 기적적은 은사라고 가정할 때, 오늘날도 그것들은 여전히 주어지는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자유, 자주하는 우주의 창조주이시다. 그는 자신의 능력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보존하시며, 모든 자연은 그에게 복종한다. 그는 기적을 행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기적을 행하셨다. 우리 모두 긴급히 요구하고 있는 바는 초자연 속에서가 아니라 자연 속에서, 기적 속에서가 아니라 역사 안에서 우선적으로 일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경적인 계시를 파악하는 일이다.

일단 역사와 자연의 과정을 통하여 끊임없이 일하시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보기 시작하면, 모든 치료는 그것이 물리적인 방법, 심리적인 방법, 수술의 방법에 의한 것이든 그러한 방법이 없이 된 것이든 하나님의 치료임을 알게 될 것이다. 물리, 심리, 수술에 의한 방법은 아마도 비기적적인 치료라고 한다. 기적들의 주된 목적은 새로운 계시가 나타난 것을 입증하는 데 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기적에 대한 주장에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완강하게 불신해서도 안 되고 무비판적으로 경신해도 안 되며, 오히려 ‘나는 오늘날 기적들을 일상적으로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적들을 주시므로 입증한 특별 계시가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론 하나님은 자유, 자주하신 분이므로 하나님께서 기꺼이 기적들을 행하시는 특별한 상황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솔직하게 연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5. 성경에 나오는 영적인 은사는 모두 오늘날도 주어지는가?

신약 성경에 언급된 카리스마타는 모두 다 이의 없이 유효하다는 전제로 시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사도들이나 선지자들이 계속 존재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사도’라는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첫째로, 예수께서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적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둘째로, 그 단어는 적어도 두 번 ‘교회의 사자들’, 곧 특별한 임무를 띠고 한 교회에서 다른 교회로 보내지는 메신저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볼 때 그 용어는 선교사들이나 특별한 사명을 띠고 파송되는 기독교인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목록들에 나타난 이러한 일차적인 의미에서 볼 때 비록 의심할 바 없이 오늘날 ‘선교사’라는 이차적인 의미를 가진 ‘사도들’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 성격상 그들에게는 계승자가 없다. 셋째로, ‘선지자’는 어떤가? 구약 시대로 돌아가서 성경적으로 이해하자면 선지자란 신의 계시의 도구로 주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 용어의 의미, 즉 성경의 본질적인 의미로 보건대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들의 증거 속에서 완성되었다고, 성경은 오래 전에 닫아졌으므로 더 이상 선지자들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해야 한다. 직접적이고 새로운 계시의 도두인 ‘선지자들’의 일차적인 의미에서 볼 때 이 카리스마는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다른 좀 작은 의미에서도 사용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 기능이 계시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미래의 사건에 대해 예언하는 것이었던 선지자 아가보와 같은 사람들이 오늘날도 있을 있다고 생각한다. 가능한 일이다.

바울은 그러한 의미로 인해 모든 카리스마타 중에서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묶어 말했던 것 같다. 또 그런 의미로 볼 때 우리는 그것들이 더 이상 교회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오늘날의 교회에 있어서 하나님의 가르치는 방법은 새로운 계시에 의해서는 아니라 그리스도와 성경 안에서 완성된 그의 계시에 대한 해석에 의해서이다.

6. ‘은사적’이란 단어

‘사도들과 선지사들’은 교회가 주는 공식적인 권위와 관계없이 하나님에 의해 부름을 받은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목사와 교사도 선지자만큼이나 ‘은사적’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도 하나님에 의해 부름을 받고 은사를 얻지 않고는 교회에 의해 직책을 지명받아서는 안 된다. 모든 교회는 은사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 지체들은 은사들의 결과로서 기능한다.

7. 영적 은사의 범위: 은사는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은사의 종류가 대단히 다양하다면 그 주심의 범위 역시 대단히 넓을 것이라고 대답해야 한다. 신약 성경은 모든 기독교인이 적어도 하나 이상의 영적인 은사 또는 봉사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 준다.

첫째로, 영적인 은사의 목록을 가지고 있는 네 개의 성경이 모두 다 이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은사들의 범위가 넓을 정도가 아니라 보편적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정말로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둘째로, 몸 비유이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은사를 가지며 따라서 그에 대한 책임을 가진다는 사실과 어떤 기독교인도 은사를 받지 않고 지나치거나 은사를 받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은 신약 성경의 교회에 대한 근본적인 교리이다. 우리의 임무는 하나님이 은사를 받을 일꾼들을 세우시도록 기도하고, 의식적으로 매장되어 있거나 무의식적으로 무시되고 있는 은사들을 계속해서 보존하며, 사람들을 권면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들을 행사하게 하고, 그들에게 그 은사들을 행할 기회가 있는 것을 확신시켜 주는 것이다. 물론 봉사를 자원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건전하고 성경적인 것은 교회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준비시켜 부르심으로 봉사하게 하는 방법들에 대해 정신 차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교회는 ‘은사 공동체’이다. 그 공동체의 모든 지체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하나 이상의 은사를 가지고 있다.

8. 영적 은사의 근원: 은사는 어디에서 오는가?

하나님께서 나온다는 것을 강조한다. 영적 은사는 하나님의 은사이다. 신약 성경은 이것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현한다.

첫째로, 영적인 은사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은사이다. 헬라 그 자체가 이것을 간명하게 지적해 준다. 카리스마타는 카리스에 의하여 주어지는, 곧 하나님의 과분한 사랑에 의하여 주어지는 선물이다. 둘째로, 영적인 은사는 하나님의 영의 은사이다. 비록 성령이 신성의 집행자이며 하나님은 오늘날 그 일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더 깊은 체험들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은사들도 성령에게만 속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고 삼위가 다 관련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셋째로, 영적인 은사는 하나님의 주권의 은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은사들과 다른 사람에게 주신 은사들은 모두 다 중요하며 필요하다. 그들은 함께 그 지체가 모두 적당하게 기능하는 그리스도의 몸을 완전하고 건강하게 구성한다. 우리를 질투와 허식에서 건져낼 수 있는 큰 진리는 영적인 은사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주어진 하나님의 은사라는 사실이다.

9. 영적 은사의 목적: 은사는 무엇을 위해 주어지는가?

하나님의 은사는 사용하기 위하여 주어진다. ‘봉사 은사’의 주된 목적은 교회를 ‘온전케 하고’ 세우는 것이다. 따라서 영적인 은사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돕고, 위로하고, 강하게 하기 위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온전케 한다’는 뜻이다. 모든 카리스마타는 개기독교인들과 전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주어져 있으므로, 더 많이 세울수록 더 중요한 것이다. 가장 가치 있는 은사는 가르치는 은사이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진리만큼 기독교인을 세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방언 그 자체로는 덕을 세울 만한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바울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개인적으로 방언하는 것도 강하게 말리고 있다. 어떤 독자들은 의심할 바 없이 고린도전서 14장 초두에서 사도 바울이 예언과 방언을 대조시키면서 예언하는 사람은 ‘교회의 덕을 세우지만’, 방언하는 사람은 ‘자신의 덕을 세우므로’ 개인적인 방언을 행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이것이 추론인지 질문을 제기한다.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로, 신약에서 말하는 ‘덕을 세움’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세우는 일을 가리킨다. 둘째로, 이미 고찰한 대로 우리는 모든 신령한 은사들이 ‘공동의 선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역을 위하여 주어지는 ‘봉사 은사’라는 가르침에 비추어 이 표현을 읽어야 한다.

우리 기독교인의 삶이란 깰 수 없는 네 가지 면--사랑, 진리, 은사, 봉사 -- 을 가진 고리 또는 원이라고 결론을 얻는다. 사랑은 결국 봉사로 나타나고 봉사는 은사를 사용하며, 가장 큰 은사는 진리를 가르치는 것인데 진리는 사랑 안에서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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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 2008. 5. 9. 22:13

제2장 성령의 충만

성령의 충만에 관해 말할 때 우리는 이 선물이 계속적으로, 그리고 점차적으로 전유되어야 하는 것임을 인정한다.

1. ‘세례’와 ‘충만’의 차이

성령의 충만은 성령 세례의 결과인 것이다. 세례는 예수계서 행하신 것이고, 충만은 그들이 받은 것이다. 세례는 단 하나밖에 없는 최초적인 체험이고, 충만은 계속적이며 영속적인 결과, 규범을 뜻하였다. 최초적인 사건인 세례는 반복될 수도 없고 상실될 수도 없다. 그러나 충만은 반복될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서든지 유지되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그것이 유지되지 않으면 상실되고 만다. 만일 상실되어도 또다시 회복될 수 있다.

성령으로 ‘충만케 되어진’ 혹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에게 새 개의 범주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첫째로, 모든 헌신한 기독교인들의 기준임을 의미한다. 둘째로, 이 표현은 특정한 사역이나 직무를 수여한 것을 의미한다. 셋째로, 성령 충만은 평생 동안의 직무보다는 오히려 당면한 의무, 특히 일을 시작할 때 사람들을 준비시키려고 주어지는 경우가 있다.

성령 충만의 증거는 성령의 은사를 행하는 데 있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데 있다. 그린도 성도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고, 성령에 의하여 풍성하게 은사를 받았지만 성령으로 충만해 있지 않았다. 성경에 의하면 성령은 받은 후 반드시 ‘방언’을 한다는 말은 가당치 않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방언의 은사는 여러 가지 은사 중에 하나이므로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 성령의 충만의 증거는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성령 충만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을까?

2. 계속적인 충당

성령으로 충만한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주 예수께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의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예수께로 오는 것과 그를 믿는 것에는 차이점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와 믿음으로 단 한번 예수께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도 계속해서 그에게 나가서 마신다. 왜냐하면 우리는 계속해서 목마르기 때문이다. 육체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 우리는 목마를 때마다 물을 마신다. 영적으로도 또한 이것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마시는 물은 흐르는 물이 된다. “어떤 사람도 성령을 소유하고는 그 성령이 자신에게만 있도록 억제할 수가 없다. 성령은 어디에 계시든지 흐른다. 우리는 복음 전파에 대해 관심도 없고, 또 복음 전파를 하지도 않으면서 성령 만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지 경계를 해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한 기독교인들에게서 다음 사람들의 축복으로 잇는 자동적인 흐름이다. 성령 충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해서 충당하기 때문이다.

3. 성령 충만의 표시

엡5:18-21은 성령 충만에 대한 명령을 그 내용으로 하면서도 성령 충만에 대한 증거를 강조한다. 성령 충만의 주요한 증거는 도덕적인 것이지 기적적인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성령의 열매에 있지 성령의 은사에 있지 않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와 은사를 묶는 강한 결합소이다.

술취함은 ‘부절제(AV)’ 또는 ‘방탕(RSV)’을 뜻한다. 술 취함을 피해야 할 이유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자기 통제를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그와 반대 현상인 성령 충만은 자기 통제를 상실하지 않는다. 오히려 갈 5:23에서 명시하고 있는 대로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는 절제이다. 성령 충만의 결과들은 사도들이 묘사하고 있는 대로 하나님과의, 그리고 성도들 상호간의 지성적이고, 절제적이며, 건전한 관계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성령 충만은 절제된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행위로 이끌어 기독교인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킨다. 성령 충만은 은밀하고 신비스런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그리고 우리들 상호 간의 도덕적인 관계이다.

그 첫 번째는 ‘말하는 것’이다. ‘혼잣말하다’로 되어 있다. ‘서로 화답하며(19절)’로 표현한 것은 확실히 잘한 일이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다는 첫 번째 증거가 서로 화답하는 데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인상적인 일이다. 성령 충만의 첫 번째 표시는 교체이다. 더욱이 그것은 영적인 교제이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기 때문이다. ‘노래하며 찬송하라’(19절)는 성령 충만의 두 번째 결과로 이끈다. 그를 그의 백성들에게 증거함으로써 즐거이 그를 찬송케 한다. 셋째로, 우리는 ‘범사에 항상 감사’(20절)해야 한다. 성령 충만한 성도는 모든 일에 대해 언제나 감사한다. 감사하지 않는 시간과 감사하지 않는 환경이 있을 수 없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성부 및 성자와 바른 관계, 그리고 찬양하는 관계를 맺게 한다. 성령 충만한 성도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실제로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첫 번째의 표시인 ‘서로 화답함’과 네 번째의 표시인 피차 복종하는(21절) 우리의 상호 관계를 중시한다. 성령 충만한 성도의 표시는 스스로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복종하는 것이다. 우리의 첫 번째 의무는 주 그리스도를 경외하고 그에게 겸손히 복종하는 것이다. 성령 충만이 나타나는 두 가지 중요한 영역은 예배와 교제이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 찬용하고 우리 아버지께 감사할 것이며, 서로 화합하고 복종할 것이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리고 사람과 바른 관계를 맺게 해 준다.

4. 성령 충만의 명령

첫째로, 그 동사는 명령법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선택하신 사도들 가운데 한 사람이 전적인 권위를 가지고 우리에게 주는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둘째로, 그 동사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 성령의 충만은 어떤 사람에게만 예약된 특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된 의무이다. 셋째로, 그 동사는 수동태이다. 그것은 ‘성령으로 하여금 너에게 충만케 하라’ 넷째로, 그 동사는 현재 시제이다. 현재 명령법은 그 문제를 영원히 결말지을 어떤 극적이고 결정적인 경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충당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밝힘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며, 아는 즐거움에 참여함으로써 믿음을 가진다.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불신앙을 회개하고 믿음을 더해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지식이 자랄 때, 우리의 믿음도 그와 함께 자라고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목적과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더욱 많이 알게 될 것이다.

5. 보통 기독교인

중생의 의식적인 과정이라는, 다시 말해서 거듭난 사람이 자기의 내면 속에서 무슨 일이 발생하는지를 의식할 수 있다는 견해를 뒷받침할 만한 성경적 근거는 하나도 없다. 우리가 중생 혹은 영적인 태어남이라고 부르는 이 영적인 생명의 주입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은 마치 육적인 태어남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 두 경우 다 자기의식 곧 살아 있다는 의식은 후에 생겨난다. 회심한 후의 저자원적인 기독교 생활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진실로 성령 세례를 받았지만 여전히 성령 세례가 가능케 하는 생활 이하의 삶을 살고 있다. 그 이유는 성령으로 충만해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하나의 경험을 두 단계 혹은 그 이상으로 가진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기독교인들의 죄로 말미암아 기인한 것이다.

6. 특별한 경험들

첫째는, 이러한 경험들 중에 몇 가지는 사탄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둘째는, 아주 많은 경험들이 심리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 인간의 정신에서 기원하기 때문이다. ‘방언’은 곧 의식 있는 마음의 통제를 받지 않고 나오는 비자발적인 언어는 힌두교, 이슬람교, 몰몬교 등에서도 널리 알려진 것이며 어떤 의학적인 조건하에서도 행해질 수 있다. 인간의 정신에서 나오는 것은 사탄에게서 나오는 것과 같지 않다. ‘심리적인’ 것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는 중립적일 수도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의를 장려하느냐 하는 데 있다. 셋째는 현대의 어떤 체험들은 실제로 회심으로 인한 체험처럼 보인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인의 삶은 새로 태어남, 곧 다양한 방법으로 일어날 수 있지만 반드시 성령의 ‘선물’ 혹은 ‘세례’를 포함하는 새로운 태어남으로 시작하여 성숙함에 이르는 성장으로, 다시 말해서 아주 다양하고 보다 깊은 체험들을 가질 수 있는 과정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체험들은 실로 감동적이고 심지어 흥분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중에 어느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와 화목하셨을 때 나타나는 그의 첫 번째 은혜 사역의 중요성과 족히 비교할 수가 없다. 결과로서 일어나는 경험들에 대한 나의 논점은 그것들이 모두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7. 권면

첫째로, 우리 모두는 성령께서 활발하게 일하시는 이 시대에 그가 말씀하시는 바와 우리 사이에서 행하시는 것에 민감해야 한다. 우리는 성령을 교사로 혹은 증거자로 아는 가운데 기뻐해야 하며 그가 우리에게 주신 사랑, 희락, 화평, 그리고 능력 가운데서 기뻐해야 한다. 둘째로, 성령은 자주적인 영이심을 기억하라. 그는 ‘그 뜻대로’ 여러 가지 영적인 은사들을 부여하실 뿐 아니라 또한 그 뜻대로 특별한 사역을 행하시기도 한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공유하는 것은 영적인 은혜이지 영적인 은사, 곧 영적인 체험이 아니다. 당신은 체험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양하도록 하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권고할 때는 체험에 근거하지 말고 성령에 기준하여 하라. 셋째로, 계속해서 성령으로 충만해지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령을 좇아 행하기를 추구하라. 이 공통된 근거를 기쁨으로 함께 가질 때 우리들 사이에 어떤 분열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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