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서적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차이나통 2008. 5. 9. 22:13

제2장 성령의 충만

성령의 충만에 관해 말할 때 우리는 이 선물이 계속적으로, 그리고 점차적으로 전유되어야 하는 것임을 인정한다.

1. ‘세례’와 ‘충만’의 차이

성령의 충만은 성령 세례의 결과인 것이다. 세례는 예수계서 행하신 것이고, 충만은 그들이 받은 것이다. 세례는 단 하나밖에 없는 최초적인 체험이고, 충만은 계속적이며 영속적인 결과, 규범을 뜻하였다. 최초적인 사건인 세례는 반복될 수도 없고 상실될 수도 없다. 그러나 충만은 반복될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서든지 유지되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그것이 유지되지 않으면 상실되고 만다. 만일 상실되어도 또다시 회복될 수 있다.

성령으로 ‘충만케 되어진’ 혹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에게 새 개의 범주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첫째로, 모든 헌신한 기독교인들의 기준임을 의미한다. 둘째로, 이 표현은 특정한 사역이나 직무를 수여한 것을 의미한다. 셋째로, 성령 충만은 평생 동안의 직무보다는 오히려 당면한 의무, 특히 일을 시작할 때 사람들을 준비시키려고 주어지는 경우가 있다.

성령 충만의 증거는 성령의 은사를 행하는 데 있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데 있다. 그린도 성도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고, 성령에 의하여 풍성하게 은사를 받았지만 성령으로 충만해 있지 않았다. 성경에 의하면 성령은 받은 후 반드시 ‘방언’을 한다는 말은 가당치 않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방언의 은사는 여러 가지 은사 중에 하나이므로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 성령의 충만의 증거는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성령 충만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을까?

2. 계속적인 충당

성령으로 충만한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주 예수께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의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예수께로 오는 것과 그를 믿는 것에는 차이점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와 믿음으로 단 한번 예수께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도 계속해서 그에게 나가서 마신다. 왜냐하면 우리는 계속해서 목마르기 때문이다. 육체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 우리는 목마를 때마다 물을 마신다. 영적으로도 또한 이것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마시는 물은 흐르는 물이 된다. “어떤 사람도 성령을 소유하고는 그 성령이 자신에게만 있도록 억제할 수가 없다. 성령은 어디에 계시든지 흐른다. 우리는 복음 전파에 대해 관심도 없고, 또 복음 전파를 하지도 않으면서 성령 만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지 경계를 해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한 기독교인들에게서 다음 사람들의 축복으로 잇는 자동적인 흐름이다. 성령 충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해서 충당하기 때문이다.

3. 성령 충만의 표시

엡5:18-21은 성령 충만에 대한 명령을 그 내용으로 하면서도 성령 충만에 대한 증거를 강조한다. 성령 충만의 주요한 증거는 도덕적인 것이지 기적적인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성령의 열매에 있지 성령의 은사에 있지 않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와 은사를 묶는 강한 결합소이다.

술취함은 ‘부절제(AV)’ 또는 ‘방탕(RSV)’을 뜻한다. 술 취함을 피해야 할 이유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자기 통제를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그와 반대 현상인 성령 충만은 자기 통제를 상실하지 않는다. 오히려 갈 5:23에서 명시하고 있는 대로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는 절제이다. 성령 충만의 결과들은 사도들이 묘사하고 있는 대로 하나님과의, 그리고 성도들 상호간의 지성적이고, 절제적이며, 건전한 관계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성령 충만은 절제된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행위로 이끌어 기독교인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킨다. 성령 충만은 은밀하고 신비스런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그리고 우리들 상호 간의 도덕적인 관계이다.

그 첫 번째는 ‘말하는 것’이다. ‘혼잣말하다’로 되어 있다. ‘서로 화답하며(19절)’로 표현한 것은 확실히 잘한 일이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다는 첫 번째 증거가 서로 화답하는 데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인상적인 일이다. 성령 충만의 첫 번째 표시는 교체이다. 더욱이 그것은 영적인 교제이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기 때문이다. ‘노래하며 찬송하라’(19절)는 성령 충만의 두 번째 결과로 이끈다. 그를 그의 백성들에게 증거함으로써 즐거이 그를 찬송케 한다. 셋째로, 우리는 ‘범사에 항상 감사’(20절)해야 한다. 성령 충만한 성도는 모든 일에 대해 언제나 감사한다. 감사하지 않는 시간과 감사하지 않는 환경이 있을 수 없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성부 및 성자와 바른 관계, 그리고 찬양하는 관계를 맺게 한다. 성령 충만한 성도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실제로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첫 번째의 표시인 ‘서로 화답함’과 네 번째의 표시인 피차 복종하는(21절) 우리의 상호 관계를 중시한다. 성령 충만한 성도의 표시는 스스로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복종하는 것이다. 우리의 첫 번째 의무는 주 그리스도를 경외하고 그에게 겸손히 복종하는 것이다. 성령 충만이 나타나는 두 가지 중요한 영역은 예배와 교제이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 찬용하고 우리 아버지께 감사할 것이며, 서로 화합하고 복종할 것이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리고 사람과 바른 관계를 맺게 해 준다.

4. 성령 충만의 명령

첫째로, 그 동사는 명령법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선택하신 사도들 가운데 한 사람이 전적인 권위를 가지고 우리에게 주는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둘째로, 그 동사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 성령의 충만은 어떤 사람에게만 예약된 특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된 의무이다. 셋째로, 그 동사는 수동태이다. 그것은 ‘성령으로 하여금 너에게 충만케 하라’ 넷째로, 그 동사는 현재 시제이다. 현재 명령법은 그 문제를 영원히 결말지을 어떤 극적이고 결정적인 경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충당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밝힘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며, 아는 즐거움에 참여함으로써 믿음을 가진다.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불신앙을 회개하고 믿음을 더해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지식이 자랄 때, 우리의 믿음도 그와 함께 자라고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목적과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더욱 많이 알게 될 것이다.

5. 보통 기독교인

중생의 의식적인 과정이라는, 다시 말해서 거듭난 사람이 자기의 내면 속에서 무슨 일이 발생하는지를 의식할 수 있다는 견해를 뒷받침할 만한 성경적 근거는 하나도 없다. 우리가 중생 혹은 영적인 태어남이라고 부르는 이 영적인 생명의 주입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은 마치 육적인 태어남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 두 경우 다 자기의식 곧 살아 있다는 의식은 후에 생겨난다. 회심한 후의 저자원적인 기독교 생활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진실로 성령 세례를 받았지만 여전히 성령 세례가 가능케 하는 생활 이하의 삶을 살고 있다. 그 이유는 성령으로 충만해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하나의 경험을 두 단계 혹은 그 이상으로 가진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기독교인들의 죄로 말미암아 기인한 것이다.

6. 특별한 경험들

첫째는, 이러한 경험들 중에 몇 가지는 사탄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둘째는, 아주 많은 경험들이 심리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 인간의 정신에서 기원하기 때문이다. ‘방언’은 곧 의식 있는 마음의 통제를 받지 않고 나오는 비자발적인 언어는 힌두교, 이슬람교, 몰몬교 등에서도 널리 알려진 것이며 어떤 의학적인 조건하에서도 행해질 수 있다. 인간의 정신에서 나오는 것은 사탄에게서 나오는 것과 같지 않다. ‘심리적인’ 것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는 중립적일 수도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의를 장려하느냐 하는 데 있다. 셋째는 현대의 어떤 체험들은 실제로 회심으로 인한 체험처럼 보인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인의 삶은 새로 태어남, 곧 다양한 방법으로 일어날 수 있지만 반드시 성령의 ‘선물’ 혹은 ‘세례’를 포함하는 새로운 태어남으로 시작하여 성숙함에 이르는 성장으로, 다시 말해서 아주 다양하고 보다 깊은 체험들을 가질 수 있는 과정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체험들은 실로 감동적이고 심지어 흥분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중에 어느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와 화목하셨을 때 나타나는 그의 첫 번째 은혜 사역의 중요성과 족히 비교할 수가 없다. 결과로서 일어나는 경험들에 대한 나의 논점은 그것들이 모두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7. 권면

첫째로, 우리 모두는 성령께서 활발하게 일하시는 이 시대에 그가 말씀하시는 바와 우리 사이에서 행하시는 것에 민감해야 한다. 우리는 성령을 교사로 혹은 증거자로 아는 가운데 기뻐해야 하며 그가 우리에게 주신 사랑, 희락, 화평, 그리고 능력 가운데서 기뻐해야 한다. 둘째로, 성령은 자주적인 영이심을 기억하라. 그는 ‘그 뜻대로’ 여러 가지 영적인 은사들을 부여하실 뿐 아니라 또한 그 뜻대로 특별한 사역을 행하시기도 한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공유하는 것은 영적인 은혜이지 영적인 은사, 곧 영적인 체험이 아니다. 당신은 체험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양하도록 하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권고할 때는 체험에 근거하지 말고 성령에 기준하여 하라. 셋째로, 계속해서 성령으로 충만해지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령을 좇아 행하기를 추구하라. 이 공통된 근거를 기쁨으로 함께 가질 때 우리들 사이에 어떤 분열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