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자료

바울은 누구인가?

차이나통 2008. 4. 5. 01:20
중국어 예배의 한승호 형제님한테서 받은 편지인데...
"바울은 누구인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우리 교회다니는 정선자 자매님이 발표를 했답니다.

바울/사울은 누구인가?


기독교 박해와 회심

기독교교회의 가장 초기의 문필가요, 신학자요, 이방인 선교사인 바울 그는 기독교역사에 있어서 처음으로 이방인 선교를 시작하여 교회를 설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기독교신학의 창설자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가 남긴 여러 서신들은 현존하는 가장 고대의 기독교 문서로서 기독교신학의 근간이 되고 있다.

우리가 왜 바울이 개종 전에 기독교 박해에 앞장을 섰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보유하고 있는 두 종류의 이름, 곧 전통적인 유대인으로서의 “사울”과 다소와 로마제국의 시민권자로서의 “바울”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그가 특별히 유대와 희랍 등 두 종류의 문화적 배경에서 성장해왔다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1. 다소와 로마 시민권자로서 바울

우리는 비록 바울 자신이 그의 서신에서 직접 말하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전해주고 있는 것처럼 로마제국 내의 길리기아 지역의 수도였던 희랍도시 다소에서 다소와 로마의 시민권자로 출생하였다라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다.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가서 동족 유대인들 때문에 당시 예루살렘에 있었던 로마 군대 천부장에게 체포되었을 때에 그는 천부장을 향해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성의 시민이다”(행 21:39)라고 말하였으며, 또 천부장의 병사들이 그를 채찍질하였을 때 곁에 섰던 백부장을 향해 “너희가 로마 사람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행22:25)항의하며, 또 천부장에게 이르되“나는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자이다”(행 22:28)라고 대답하였다.

사도행전에 나타나있는 이와 같은 누가의 증언으로부터 우리가 바울 자신의 가정환경과 가문의 상황을 어느 정도 추측하는 것이 가능하다. 당시 시민권만을 획득하는데 있어서도 최소한 500 드라크마(당시 5백 드라크마는 성인 노동자의 2년 수입에 해당하는 상당한 금액이었다). 이상의 돈이 있어야 했고, 그리고 당시 로마의 시민권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사회적 신분을 갖춘 사람들에게 주어졌다라는 점을 상기할 때 당시 바울의 가정은 다소에서 상당한 재력과 명성을 가진 유대인 가문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바울이 어릴 때 그 부모들이 상당한 재정적 부담을 감수하면서 그를 유대인들의 성지인 예루살렘으로 유학시켜 거기서 엄한 바리새파 랍비교육을 받도록 했다(행 22:3)라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해준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2. 히브리인과 바리새인으로서의 사울

바울은 빌립보서 3장 5절에 있는 그의 자서전적 고백에서 “내가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11장 22절에서도 유대 적 배경을 자랑하는 자신의 반대자들을 염두에 두면서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라고 말하고 있으며, 로마서 11장 1절에서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점에서 사도행전 22장 3절의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화에서 엄한 교육을 받았다”라는 누가의 보도와 바울 자신의 증언 사이에는 분명한 일치가 있다.

바울이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라는 사실은 비록 부모들이 희랍의 도시 다소에 살았지만 그 부모는 희랍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유대교와 전통을 철저히 고수하는 전통적이며 대단히 보수적인 유대인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그가 베냐민 지파의 출신이라고 하는 것은 바울의 가정이 개종자의 후예가 아니라 유대의 초대 임금 사울의 가문이며, 유다지파를 끝까지 지원한 명문가문인 것을 강조해주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자서전적인 증언에서 “바리새인”으로 말하고 있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대로 “바리새파”는 1세기 유대 사회에서 “사두개파”, “에센파”와 함께 가장 영향력을 가진 종교 집단이었다. 사두개파가 주로 당시 소수의 정치 및 종교 지배층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바리새파는 유대 종교와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일종의 대중적인 종교-사회적 운동을 띠고 있어 일반 백성들로부터 가장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바리새인이 되는데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길은 율법에 정통한 랍비의 문하생이되어 철저히 율법을 공부하는 것, 그것도 지상에서 가장 거룩하며 율법 공부에 가장 적합한 장소로 불리워지고 있던 예루살렘에서 공부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가 전하고 있는 것처럼 바울은 청소년시절에 예루살렘에 와서 당대의 가장 유명한 바리새파 랍비로 알려져 있던 랍비 가말리엘 1세 문하생이 되어 정규적인 율법 공부를 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갈라디아서 1:14절에서 바울 자신이 친히 “내가 내 백성동년배 중에서 누구보다도 유대교에 앞선 진보를 보여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3. 크리스천 박해자로서의 사울과 회심

사도행전에 18:12절에 언급되고 있는 바울을 재판한 아가야 총독 갈리오가 델피 신전에 의존하여 그의 재임기간이 주후 51년에서 53년으로 볼 때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지역에 대략 주후 50/51년에 도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예루살렘 첫 번째 회의는 48/49년에 열렸을 것으로 추산된다. 우리가 다시 갈라디아서에 근거하여 예루살렘회의를 기점으로 하여 15년이나 혹은 17년을 더 뒤로 돌아가면 우리는 바울의 개종 연대를 32/34년 사이로 잡을 수 있다. 예수의 십자 처형이 주후 30년4월에 있었다고 볼 때 우리는 다메섹도상에서의 바울의 개종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시기로부터 별로 떨어지지 않는 아주 이른 기독교 초기에 이루어졌다라고 볼 수 있다.

사울은 무슨 이유 때문에, 무슨 동기에서 스데반을 중심한 헬라계 유태인 크리스천들을 박해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는가?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이 문제에 관련하여 그 자신의 동년배중 누구보다도 조상들의 유전, 말하자면 유대종교의 핵심인 율법에 대한 지나친 “열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다(갈 1:14). 조상들의 유전에 대한 열심과 크리스천들의 핍박 사이에는 서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사울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 때문에 유대종교의 근간인 성전을 모독하고 율법을 깨뜨리는 크리스천들을 필요하다면 죽여서라도 제거하여 자신의 종교를 고수하려고 했던 것이다.

바울은 이와 같은 종교적 열심 때문에 유대종교 안에서 일어난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를 박멸시키려 했다. 갈라디아서 1:13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고 잔해하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사울이 이토록 크리스천들을 박해한 이유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크리스천들을 핍박하는데 앞장을 섰는가? 왜 그는 크리스천들 때문에 조상들의 전승에 대한 강한 열심을 가지게 되었는가?

사울이 크리스천들 핍박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라는 사실은 그가 누구 못지않게 초대 크리스천들과 그들의 신앙에 관하여 상당한 이해가 있었다라는 것을 전제한다. 왜냐하면 알지 않고 행동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울 자신의 입장에서 볼 때 초대 크리스천들의 신앙은 그 자신이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유대교 종교에 심히 위협적인 것으로 여겨졌음이 분명하다. 특별히 그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스데반을 중심한 헬라계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유대민족의 신앙과 생활의 중심점이요 보루였던 예루살렘 성전과 율법에 도전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누구보다도 강한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일찍이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 파멸을 예고하였을 때 당시 유대 정치 지도자들이 분노하여 이를 예수 처형의 결정적인 근거로 삼았던 것처럼(막14:58; 마26:61; 요2:19),주로 신유대 종교 보존에 힘쓰는 바리새파 출신인 사울은 예수의 전철을 따라 이제 할라계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성전과 율법을 비판하는 것을 보고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미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백성들을 미혹하고 유대종교를 위협하였기 때문에 십자가에 처형시킨 나사렛 예수를 유대인들이 민족적으로 기다리는 메시아로, 하나님의 아들로, 주님으로 고백하고 전파하는 것을 알았을 때 더 더욱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알고 있는 신명기 21:22절은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고, 이미 자기 당대에 십자가처형을 받은 자가 이에 해당하는 자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당시 사울은 기독교 신자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십자가처형을 당한 예수를 오히려 메시아로, 하나님의 아들로 전파하였을 때 이를 하나님께 대한 신성 모독으로 간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후에 그가 다메섹 사건을 통하여 회심하였을 때 그 자신이 갈라디아서 3:13절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기 위해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았다”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러나 당시에는 십자가에 처형당한 나사렛 예수를 백성들을 거짓된 길로 인도하는 불경된 자로, 그래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울은 나사렛 예수를 추종하는 초대 크리스천 역시 나사렛 예수처럼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알고는 초대 크리스천 역시 나사렛 예수처럼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자로 알고 그들을 핍박하는데 앞장을 설 수 있었던 것이다.

갈라디아서 1:16절에서 스스로 메시아와 하나님의 아들로 자처하다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처형당했다고 생각했던 그 예수를 오히려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에게 그의 아들로 계시하셨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자신이 핍박했던 그 나사렛 예수가 오히려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믿는 모든 사람들의 구주와 주님으로 그에게 계시되었던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거짓되었다고 생각하여 핍박했던 크리스천들과 그들의 메시지가 옳았으며 반면에 그 자신이 신뢰해 왔던 모든 신앙들이 근본적으로 잘 못 되었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바울 자신이 갈라디아서 1:16절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자신에게 계시하신 것은 나로 하여금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파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하고, 롬 1:1,5절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구별되고, 은혜와 사도직을 받았다.(살전2:4; 고전1:17)라고 한 점을 볼 때 부정할 수 없다.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남과 동시에 새로운 사명이 주어졌을 때 지난날의 율법에 대한 그의 열심이 이제는 복음에 대한 열심으로 바뀌어졌던 것이다. 율법의 행위에 의해 의를 추구했던 바리새파 신학의 자리가 다메섹사건을 통하여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의로워지는 복음으로 대신 메워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지난날 자신이 그렇게 추구해 왔던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다 배설물처럼 취급하였던 것이다. 가치 판단에 대한 근본적인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빌 3:8). 그 자신의 지난날 크리스천에 대한 핍박이 크면 클수록 그 자신의 변화 또한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났던 것이다.